2020. 6. 30. 아래 내용은 이전 블로그에 있던 글 [링크] 을 새로운 블로그로 옮긴 것입니다. 같은 내용을 이전 블로그에서도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제목과 이전 글에는 청중토론 기록을 함께 기록한다고 되어 있습니다만 청중토록 기록은 포함하지 않습니다.
발제: 뚜벅쵸
서기: 만웨, 몽돌, 유눅
정리: 몽돌
1. 발제
무성애는 무엇일까요? 무성애라는 단어만 보고 유추를 해 보겠습니다. 무성애라는 단어는 영어 단어 'Asexuality'의 번역어입니다. 영어 단어 'Asexuality'에서 접두사 ‘A'는 “~이 없다” 혹은 “~이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그 뒤에 붙는 말인 ’Sexuality'는 성애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무성애라는 말은 성적인 뭔가가 없다는 뜻이겠죠?
그렇다면 성적인 무엇이 없다는 것일까요? 이에 대해서는 무성애자로 정체화 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정의가 다양합니다. 섹스를 안 하는 것, 성적 욕구가 없는 것, 연애를 안 하는 것 등... 이러한 정의는 모두 맞습니다. 저는 무성애라는 개념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다 무성애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무성애를 학술적으로 연구한다든가, 무성애 가시화 단체에서 무성애에 대해 설명을 할 때는 무성애에 대한 통합적인 개념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번에는 그 개념에 대해 설명을 하려고 합니다.
그 전에 성별정체성과 성지향성에 대해 잠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생략)
무성애자를 설명할 때 널리 쓰이는 개념은 “성적끌림을 경험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정의입니다. 특히 캐나다의 사회심리학자인 앤서니 보개트가 이런 정의를 널리 알렸습니다. 앤서니 보개트는 성정체성과 성지향성에 대한 연구를 많이 진행했으며, 무성애 연구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앤서니 보개트는 성적끌림을 “타인에게 향하는 에로티시즘, 성적 판타지”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리고 성적끌림은 “성지향성의 심리적 핵심”이라고 했는데, 즉 한 사람의 성적끌림이 누구에게 향하느냐에 따라 성지향성이 무엇이라고 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적끌림, 그리고 ‘성적으로 끌리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무성애 개념을 접한 적이 없는 유성애자들은 대부분 당연스레 성욕과 성적끌림을 하나로 보고, 성적끌림이 없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반면에 무성애자와 무성애자 퀘스처너리는 대부분 성적으로 끌린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자체를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그런데 PPT에도 나와 있듯이, 성적끌림과 정체성은 성적 행동과 상관이 높지만 똑같지는 않습니다. 이 말은 미국에서 여러 사람들을 대상으로 설문 연구한 결과를 수록한 논문에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특정한 사람에게 성적끌림을 느껴도 그 사람과 성적행동을 하지 않을 수 있죠. 반대도 가능합니다. 사실 무성애자만이 아니라 유성애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유성애자가 어떤 사람에게 성적끌림을 느낀다고 해도, 반드시 그 사람과 성적관계를 하지는 않으니까요.
실제로 무성애자 중에서도 어떤 사람에게 성적끌림을 느끼지 않아도 다른 사람과 성적 행동을 하는 경우도 적잖아 있습니다. 파트너를 성적으로 만족시키기 위해서라든가, 다른 사람과의 성적 관계를 통해 편안한 감정을 느낀다든가, 성적끌림과는 별개로 성적 자극을 느끼거나 해서입니다.
성적인 것 외에도 사람 사이에는 다른 방식으로 끌릴 수 있습니다. 무성애 커뮤니티에서 주로 논의되는 다른 끌림에 대해서도 소개하겠습니다.
로맨틱끌림은 어떤 대상과 로맨틱한 관계를 맺고자 하는 끌림입니다. 로맨틱끌림이 있느냐 혹은 없느냐에 따라 유로맨틱과 무로맨틱으로 나뉩니다.
관능적끌림은 어떤 대상과의 감각적 행위를 통해 쾌감을 얻고자 하는 끌림입니다. 흔히 이는 감각적끌림으로 많이 번역되기는 하나, 이 말의 영어 원문인 ‘Sensual Attraction'은 단순히 감각적인 측면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을 통해 쾌감 등을 얻으려고 하는 끌림을 이야기하므로, 저는 감각적끌림보다 관능적끌림이라는 번역을 더 선호합니다.
미적끌림은 어떤 대상을 감상하며 미적인 만족을 얻고자 하는 끌림입니다.
플라토닉끌림은 어떤 대상과 성적인 관계나 로맨틱 관계를 형성하고 싶지는 않지만, 친해지고 싶고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싶을 때 대상에게 느끼는 끌림입니다. 주로 무로맨틱 무성애자들이 많이 느낍니다. 로맨틱끌림과 플라토닉끌림을 구분하기 위해 크러시와 스퀴시라는 표현이 주로 사용됩니다. 크러시는 어떤 대상에게 로맨틱하게 끌려 로맨틱관계를 형성하고 싶어하는 정서적 욕구입니다. 스퀴시는 어떤 대상과 강한 플라토닉 관계를 맺고 싶어 하는 정서적 욕구입니다.
이 밖에도 다양한 끌림들에 대한 단어가 존재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너무나 다양하므로 당연하죠. 다만 오늘은 주로 성적끌림과 로맨틱끌림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둘이 많이 혼동되는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인 연인 관계는 서로 친해지고, 서로 로맨틱한 관계가 되었다가, 서로 성적끌림을 느껴 성적 관계를 맺는다는 식으로 인식됩니다. 일반적인 로맨틱-성애 관계에서는 로맨틱끌림과 성적끌림 사이에 끊임이 없기 때문에, 두 개념은 혼동되곤 합니다.
그러나 로맨틱끌림이 없어도 성적끌림은 느끼고, 반대로 로맨틱끌림은 있어도 성적끌림은 느끼지 않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윤딴딴이라고 제가 좋아하는 싱어송라이터가 있는데, <친하게 지내자>란 노래 중에 “나 너를 보면 욕정이 넘치진 않아. 대신 너를 보면 설렘이 멈추질 않아 난”이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이 노래 가사에 많은 로맨틱 무성애자들이 공감을 했습니다.
또한 끌림은 단순히 ‘끌린다’ 혹은 ‘끌리지 않는다’로 나뉘지 않습니다. 즉 1과 0이 아니라는 것이죠. 세계 최대의 무성애 가시화 단체인 에이븐에서 사용하는 ‘에이븐 삼각형’이라는 로고가 있습니다. 에이븐 삼각형은 역삼각형으로, 위가 흰색이고 아래가 검은색이며 그 사이는 흰색과 검은색 사이의 그라데이션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위 즉 흰색은 유성애자고, 아래 즉 검은색은 무성애자입니다. 또한 그라데이션 사이에 회색무성애자와 반성애자 즉 데미섹슈얼이 있습니다. 이 에이븐 삼각형은 무성애의 넓은 스펙트럼을 보여주고 있는데, 로맨틱 스펙트럼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로맨틱과 무로맨틱이 있고, 그 사이에는 회색로맨틱과 반로맨틱 즉 데미로맨틱이 있습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일반적으로 로맨틱한 감정은 성적인 감정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고 인식되고, 일반적인 유성애자들은 연애관계의 종착점은 성적관계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생각이 일반적인 상황에서 로맨틱 무성애자들은 곤란한 상황에 직면하곤 합니다.
한편 무성애의 넓은 스펙트럼을 표현하는 상징인 무성애 우산 밑에는 굉장히 다양한 무성애자들이 있습니다. 가령 오토코리섹슈얼, 양성로맨틱 무성애자, 동성로맨틱 무성애자, 무로맨틱 유성애자 등...단순히 성적끌림이나 로맨틱끌림이 나타나는 양상과 강도만 따져도 굉장히 다양한 무성애자가 존재합니다. 성격이라든가 감정이라든가 다른 요소도 포함하면 더 다양해지죠.
2011년에 무성애자 인식 주간(AAW, Asexual Awareneww Week)이라는 단체에서 무성애자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했습니다. 당초에는 500명 정도의 참가자를 예상했는데, 3000명이 넘는 무성애자들이 설문에 참가했습니다. 설문 결과를 보면 무성애자 집단에서는 비이분법적인 (논바이너리) 젠더로 자신을 소개하는 사람이 굉장히 많습니다. 하지만 전체 인구에서 비이분법적인 젠더로 정체화하는 사람은 별로 없죠. 무성애 커뮤니티에서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지 토론을 해 봤는데, 무성애 개념이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보니 자신이 무성애자임을 알기 위해서는 성적 지향성과 정체성에 관해 다양한 정보를 알아야 하는데 그러면서 무성애라는 성지향성과 더불어 성정체성도 알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얘기가 나왔어요. 또한 데미섹슈얼이 상당히 많고, 무로맨틱 무성애자는 흔한 고정관념과 달리 그리 많지는 않으며 반대로 로맨틱 무성애자가 많았습니다.
다음으로는 무성애에 대한 오해를 이야기해 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제가 키워드를 가지고 왔습니다. 여기 있는 키워드 말고도 무성애에 대한 다양한 오해가 존재합니다. 어떤 오해를 반박해볼까요?
(참가자: 무성애자를 다룬 창작물에서는 무성애자를 무성욕자라고 쉽게 치환하고, 그런 정체성 때문에 굉장히 불행하다는 듯이 소비하는 경우가 많다. 개인적으로 무성애자 친구들이 있기 때문에, 그런 묘사를 보면 굉장히 화가 난다.)
맞습니다. 무성애자라고 하면 성욕이 없다는 식으로 받아들이는데 사실 전혀 아니죠. 심지어 오토코리섹슈얼은 성적 판타지를 느끼지만 타인에게 성적으로 끌리지 않는 정체성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성욕이 거의 없는데, 무성애자 커뮤니티에서 성욕을 이야기할 때는 소외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웃음)
여기에서 이어지는 오해들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우선 성적으로 끌리지 않거나 성욕이 없으는 것은 모두 장애라는 오해가 있습니다. 그러나 무성애는 흔히 혼동되는 여러 질환들과 구분되는 측면이 많습니다. 가령 무성애 커뮤니티에는 호르몬 검사를 받아 봤는데 다른 이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는 사람이 많습니다. 또한 적잖은 무성애자들이 소위 ‘치료’를 받아보기도 했는데, 효과가 없고 고통스럽기만 했다는 경우가 많더군요.
가장 흔히 오해받던 질환으로, 정신질환편람(DSM) 속에 ‘저활동성 성욕장애’라는 항목이 있었습니다. 저활동성 성욕장애란 성욕 저하로 인해 일상생활, 커뮤니케이션, 부부 관계 등에 문제가 생기는 질환입니다. 많은 무성애자들이 저활동성 성욕장애로 오진을 받고 효과 없는 치료를 받았습니다. 역시 고통스럽기만 한 경우가 많았죠. 그래서 최근 개정된 정신질환편람 5판에서는 저활동성 성욕장애 관련 항목에서 무성애를 예외 규정으로 넣었죠. 즉 자신의 성적욕구의 부재를 무성애로 설명할 수 있다면 저활동성 성욕장애가 아니라고 명시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다른 얘기를 하고 싶습니다. 무성애만이 아니라 다른 여러 성소수자 운동에서, 흔히 성소수자는 장애인이 아니라고 외쳐왔습니다. 남들과, 흔히 '정상'이라고 규정되는 사람과 다르면 모두 장애가 있는 것이고, 장애가 있으면 꼭 치료를 받아야 할까요? 흔히 말하는 특정 장애의 진단 기준에 부합하지만, 남들이 어떻게 하지만 않으면 스스로 전혀 불편하지 않은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가령 저활동성 성욕장애 진단 기준에 부합하며 무성애자로 스스로를 정체화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해 봅시다. 이 사람은 사실 다른 사람들이 성적인 것을 강요하지만 않는다면 진단이나 치료가 필요할 만큼 불편함을 느끼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장애로 규정되는 다른 특성들에 대해서도 같은 상황이 생길 수 있어요. 이런 장애정상성 개념에 대해 다들 한 번씩 생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다른 얘기로 넘어갈까요? 무성애자는 무로맨틱이고, 감정이 없다는 오해가 있습니다. 이런 오해가 많이 퍼져 있습니다. 일례로 평론가 허지웅씨는 방송에서 자신이 성욕이 없으니 무성욕자라고 했고, 실제로 호르몬 검사에서도 이상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무성애자라고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대중적으로는 허지웅이 무성애자의 전형으로 인식되었죠. 외국에서도 이런 사례가 있습니다. 영국 드라마 <셜록> 속의 베네딕트 컴버배치는 타인에게 성적 혹은 로맨틱적으로 끌리지도 않는 것 같고, 타인과 즐겨 교류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소시오패스라고 인식되기도 합니다. 이 셜록이 무성애자의 전형으로 인식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무성애자 중에도 타인에게 로맨틱하게 끌리는 사람이 있고, 무로맨틱이라도 플라토닉하게나 관능적으로 끌릴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감정이 꼭 누군가에게 끌리는 것에서만 나오는 것도 아니죠. 무성애와 무로맨틱과 무감정을 엮어서 생각하는 것은 세상이 로맨틱-섹슈얼한 끌림을 감정의 최고봉으로 잘못 인식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무성애자는 아직 어려서, 혹은 아직 경험이 없어서 그렇다는 오해가 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커밍아웃을 했을 때 경험이 없어서 그렇다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답답해서 섹스 경험이 있다고 밝혔는데, 이번에는 동성과 섹스를 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모르는 일이라는 답변이 나왔었습니다. (웃음) 참 웃기는 말이죠. 경험이 없다고 해서 성적끌림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나이와는 상관이 있을 수 있죠. 유성애자도 보통 사춘기가 지나가면서 성적인 욕구와 끌림을 경험하니까요. 그러니 사춘기 이전이라면 무성애자라고 정체화하더라도 나중에 달라질 가능성이 좀 더 높겠죠. 하지만 나중에 달라지더라도 본인이 현재 무성애란 단어가 필요하다면 나중에 바뀔 가능성을 가지고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현재 성적 관계를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 성적 관계를 “경험해봐야 한다”는 식의 말은 필요하지 않은 일을 강요하는 것이죠.
무성애는 성 억압주의 때문이라는 오해가 있습니다. 그러나 무성애는 섹스를 억압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무성애자와 무성애 커뮤니티 활동은 한국보다 성적 개방성이 훨씬 높은 미주 및 유럽에서 더 활발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여성은 성욕이 약하니까 여성 무성애자가 많다는 오해도 있습니다. 전혀 아닙니다. 무성애자 중에서도 여성이 아닌 사람도 많은데다가, 중요한 점은 무성애는 성별 문제가 아닙니다. 성적 욕구나 끌림이 강한 유성애자 여성도 많지 않나요?
무성애자는 성소수자가 아니라는 오해가 있습니다. 이런 오해는 흔합니다. 비성소수자나, 비무성애자인 성소수자 사이에서도 무성애자가 왜 성소수자냐며 따지는 경우가 흔합니다. 무성애자는 박해를 받지도 않고, 무성애자라는 이유로 총기난사를 당하지도 않고, 혐오폭력을 당하지도 않는데 무성애자가 왜 성소수자냐는 인식이죠.
그런데 이런 사람들은 두 가지를 놓치고 있습니다. 사회의 주류적인 정체성은 시스젠더-헤테로섹슈얼이고, 무성애자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성소수자로서 다양한 차별을 겪는 것입니다. 또한 성소수자라는 것은 얼마나 힘든지 겨루는 배틀이 아닙니다. (웃음)
성소수자들은 세상이 유성애중심적, 이성애중심적, 성별이분법적이지 않으면 겪지 않아도 되었을 일을 겪으니 성소수자입니다. 무성애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안타깝게도 몇몇 무성애자는 성소수자 그룹에서 배제를 당하니 자신이 성소수자가 아니라고 인식하거나, ‘저들은 나와는 다르다’라고 인식하고 연대를 하지 않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하는데 무성애자는 성소수자고, 세상의 기준에 맞지 않다고 차별을 받고 있습니다. 이는 어쩔 수 없는 현실입니다.
(참가자: 연애 경험이 있는데 왜 무성애자냐며 따지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누차 말했듯이 로맨틱끌림과 성적끌림은 다릅니다. 또한 자신이 무성애자로 정체화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성적 관계나 로맨틱한 관계를 경험하거나 하지 않을 필요는 없습니다. 경험과 느낌과 행동은 별개이니까요.
제 발제는 여기까지이며, 잠시 쉬는 시간을 가진 후 다음 순서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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